나는 번역이 잘못된 글을 읽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엉터리 문장을 읽으면 불쾌하고, 번역가의 성의 없고 뻔뻔한 자세에 화가 나고, 미국 심리학에 종속돼 있는 한국 심리학계의 현실에 갑갑함을 느끼고, 한국의 영세한 출판 시장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다. 정말 읽기 힘들 정도로 번역의 질이 낮은 책은 요즘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런 책은 사 놓고 결국 안 보게 된다.
문제는 꼭 봐야 하는 책, 예를 들어서 교과서의 번역이 잘 안 되어 있을 경우이다. 유감스럽게도 심리학 교과서 번역본들은 문제가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다. 우리 과에서는 전공 개론 시간에 보는 교과서를 번역에 매우 문제가 많은 책으로 몇 년 보고 있다가(차마 어디 책이라고 말은 못하겠다.)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올해 다른 책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미안하게도 이 책도 큰 차이가 없다(역시 이 책도 어디 것이라고 말 못 하겠다…). 원문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문장도 문장이지만, 명백한 오류나 원문에도 없는 초월 번역도 많고 심지어는 분명히 번역자분들의 전공 분야인데도 너무도 분명하게 틀리게 옮긴 것들도 왕왕 있는 것이 놀랍다. 엉터리로 번역된 전공 서적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냥 설렁설렁 읽으면 대충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문장 단위로 해석을 하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번역하신 분들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 한 채로 본인의 전공 지식을 동원해서 맥락상 연결이 되게 어물쩍 옮기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백 번 양보해서 대중 교양서라면 그렇게 대충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허용이 될 수도 있겠다만, 전공 서적을 그런 식으로 써서 학생들이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고 읽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너무 화가 난다. 그뿐 아니라 우리 과에서 보고 있는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나라도 뭔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앞으로 이 책을 보다가 내가 찾은 번역의 잘못된 점들을 내 웹사이트에 정리하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이나 이 책으로 공부를 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알게 된다면 이걸 보고 번역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꿈꾸는 것은 한국심리학회에서 여러 분들의 지혜를 모아서 함께 책을 하나 쓰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 미국의 대중문화의 참조, 미국 사람들의 사진과 카툰으로 가득한 책을 맨날 읽히는 것은 학생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심리학자들이 재능 기부로 조금씩 힘을 합쳐서 책을 만든다면 돈도, 노력도 적게 들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적은 인쇄비만 받거나 아예 그냥 pdf 파일을 무료로 공개하는 방식을 써서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 사정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본다.
2 Comments
최아람
9/29/2022 01:09:40 am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너무너무 공감 가는 글입니다. 사실 어떤 전공이든 전공 공부가 전부 어렵긴 하겠지만, 때때로 문장이 너무 안 읽어져서 정말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야만 이해가 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문장과 문장의 연결뿐만 아니라 한 문장 내에서도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문장을 끊어서 서술한다면 이해가 더 잘 되고 지식이 명확히 전달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한국에서 심리학자분들께서 힘을 모아 심리학 교과서를 내주신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위주의 문화와 정서를 배우고 공부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되지만, 한국의 정서가 반영된 심리학 책이 더 나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잘못된 부분을 웹사이트에 정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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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10/3/2022 03:07:36 pm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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