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요약: '혐오'라는 말을 좀 가려 쓰자.
요즘은 혐오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 내의 많은 집단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언어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 같다. 과연 정말로 사람들이 지난 시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을 더 싫어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만 느껴지는 건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인터넷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정제되지 않은 말이 더 많아진 건 아닐까? 사람들이 더 솔직해진 건 아닐까? 지역주의나 '노골적인'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는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혐오'라는 표현 자체가 지나치게 많이 또는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연 혐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말이 옳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해 보고자 한다. 내가 혐오라는 단어가 남용, 오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단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혐오'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싫어하고 미워함'이라고 뜻이 적혀 있다. '嫌'은 싫어한다는 뜻이고 '惡'는 미워한다는 뜻이니 단어를 있는 그대로 옮긴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니다. '혐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처음 나오는 단어가 'hatred', 둘째 단어는 'disgust'이다. disgust는 hatred와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싫어함'이라는 뜻 외에 '역겨움'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징그럽거나 끔찍한 무언가를 보면 역겹고 속이 울렁거릴 수는 있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하는 건 그다지 적확하지 않은 것 같다. 정서로서도 이 둘은 서로 다른 정서로 분류되고 있다(disgust와는 달리 hatred는 기본 정서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문제는 혐오에 대한 많은 글을 보면 이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거나, 글마다 다른 것을 의미하거나, 심지어는 두 의미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혐오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맥락이 '혐오 표현'인데, 이는 영어의 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그렇다면 줄곧 hate의 의미로 생각을 하면 되겠지만, 다음의 글들처럼 글 중간에 의미가 바뀌는 경우들이 있다.
2. 이 단어는 현상을 과장된 형태로 표상하고 있다. hate, 즉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맥락들만 보더라도 '이게 정말 혐오라고 말할 정도인가?'라고 의아하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있다. 다음의 글들에서는 대상을 정말 강하게 싫어하는 것이 명백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혐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반면 다음의 경우들은 '혐오'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맥락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모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맥락에서 혐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생각과 정서, 행동을 '여성 혐오'라고 일컫는 것은 일본 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줄여서 '여혐'이라고 하면 간편하고 입에 착착 붙다 보니 그 번역이 적절할지 고민도 해 보기 전에 널리 퍼져서 사용되고 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여배우'라는 말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개념의 의미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성 혐오'의 준말은 '혐여'가 돼야 하지 않을까? 한문에서는 영어처럼 문장 성분들을 '주어+술어+목적어'의 순서로 나열하니 말이다. '혐중', '혐한', '반일', '친일'과 같이 말이다. '여혐'은 엄밀히 말하면 '여자가 싫어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미 말이 언중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서 '혐여', '혐남'이라고 고쳐 나가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한 집단에 대한 모든 종류의 편향을 '혐오'라는 말로 아울러서 말하는 것은 대상이 여성인 경우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여성 혐오'라는 말이 퍼지면서 혐오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그렇게 이것저것 다 담는 것으로 오염이 돼 버린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 어떤 경우에는 '혐오'라고 인정되기 위해서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 혐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4. 대상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 느낌, 행동을 '혐오'라고 하는 것은 게으른 자세다. 위에서 본 사례들에서와 같이 '혐오'를 광범위한 현상들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 있다. 즉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특정해야 하는 부담 없이 간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편향이 발현될 수 있는 수많은 양상들을 무시하고 마치 단일한 현상인 것처럼 말하게 하므로 무엇이 문제인지, 그 원인과 결과, 해결책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럼 혐오 말고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혐오라는 표현이 적절한 맥락도 매우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집단을 다르게 지각하고 그들에 대해 독특한 정서를 느끼고 그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혐오'라는 두 글자에 쓸어담는 것은 위에 쓴 것처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현상의 복잡다단한 양상들을 잘 분류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각각에 적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외집단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들에는 혐오(역겨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외에도 증오(hatred를 가리키는, 어쩌면 더 적절한 번역어), 동정, 경멸/멸시/비하, 무관심, 적대감 등이 있고, 행동은 공격, 착취, 무시, 조롱, 괴롭힘, 따돌림/배제/소외, 보호, 우대 등이 있다. 아래의 글에서는 내 주장과 비슷하게 '적대적 성차별주의'에만 '(여성) 혐오'라는 말을 사용하고, '온정적 성차별주의'에는 혐오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성차별주의'(sexism)라는 말을 쓰자고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사회심리학에서도 '편향', '고정관념', '편견', '차별', '낙인' 말고는 다른 표현들이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일반적인 원리의 발견을 추구하는 학문 분야의 지향성 때문이므로 이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외집단에 대한 취급의 여러 다른 양상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잘 구분하고 이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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