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이 공익광고를 많이 틀어주고 있다. 나는 이 동영상을 볼 때마다 과연 이 동영상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지 의문이 든다.
여러분들은 이 동영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내가 했던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반면 마약을 하면 청춘도 건강도 젊음도 인생도 끝난다는데, 어떻게 끝난다는 건지, 왜 끝난다는 건지, 끝난다는 게 뭘 뜻하는 건지('끝내준다'와 '끝난다'가 유사해서 의미도 서로 헷갈린다.) 아주 모호하게만 묘사되고 있다. 하다 못해 그 흔한 공포감 조성도 없다. 이 광고를 만든 분들은 포커스 그룹을 데리고 실험을 해 보았을까?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을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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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혐오'라는 말을 좀 가려 쓰자.
요즘은 혐오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 내의 많은 집단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언어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 같다. 과연 정말로 사람들이 지난 시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을 더 싫어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만 느껴지는 건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인터넷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정제되지 않은 말이 더 많아진 건 아닐까? 사람들이 더 솔직해진 건 아닐까? 지역주의나 '노골적인'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는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혐오'라는 표현 자체가 지나치게 많이 또는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연 혐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말이 옳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해 보고자 한다. 내가 혐오라는 단어가 남용, 오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단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혐오'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싫어하고 미워함'이라고 뜻이 적혀 있다. '嫌'은 싫어한다는 뜻이고 '惡'는 미워한다는 뜻이니 단어를 있는 그대로 옮긴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니다. '혐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처음 나오는 단어가 'hatred', 둘째 단어는 'disgust'이다. disgust는 hatred와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싫어함'이라는 뜻 외에 '역겨움'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징그럽거나 끔찍한 무언가를 보면 역겹고 속이 울렁거릴 수는 있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하는 건 그다지 적확하지 않은 것 같다. 정서로서도 이 둘은 서로 다른 정서로 분류되고 있다(disgust와는 달리 hatred는 기본 정서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문제는 혐오에 대한 많은 글을 보면 이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거나, 글마다 다른 것을 의미하거나, 심지어는 두 의미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혐오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맥락이 '혐오 표현'인데, 이는 영어의 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그렇다면 줄곧 hate의 의미로 생각을 하면 되겠지만, 다음의 글들처럼 글 중간에 의미가 바뀌는 경우들이 있다.
2. 이 단어는 현상을 과장된 형태로 표상하고 있다. hate, 즉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맥락들만 보더라도 '이게 정말 혐오라고 말할 정도인가?'라고 의아하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있다. 다음의 글들에서는 대상을 정말 강하게 싫어하는 것이 명백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혐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반면 다음의 경우들은 '혐오'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맥락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모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맥락에서 혐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생각과 정서, 행동을 '여성 혐오'라고 일컫는 것은 일본 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줄여서 '여혐'이라고 하면 간편하고 입에 착착 붙다 보니 그 번역이 적절할지 고민도 해 보기 전에 널리 퍼져서 사용되고 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여배우'라는 말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개념의 의미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성 혐오'의 준말은 '혐여'가 돼야 하지 않을까? 한문에서는 영어처럼 문장 성분들을 '주어+술어+목적어'의 순서로 나열하니 말이다. '혐중', '혐한', '반일', '친일'과 같이 말이다. '여혐'은 엄밀히 말하면 '여자가 싫어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미 말이 언중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서 '혐여', '혐남'이라고 고쳐 나가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한 집단에 대한 모든 종류의 편향을 '혐오'라는 말로 아울러서 말하는 것은 대상이 여성인 경우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여성 혐오'라는 말이 퍼지면서 혐오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그렇게 이것저것 다 담는 것으로 오염이 돼 버린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 어떤 경우에는 '혐오'라고 인정되기 위해서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 혐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4. 대상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 느낌, 행동을 '혐오'라고 하는 것은 게으른 자세다. 위에서 본 사례들에서와 같이 '혐오'를 광범위한 현상들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 있다. 즉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특정해야 하는 부담 없이 간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편향이 발현될 수 있는 수많은 양상들을 무시하고 마치 단일한 현상인 것처럼 말하게 하므로 무엇이 문제인지, 그 원인과 결과, 해결책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럼 혐오 말고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혐오라는 표현이 적절한 맥락도 매우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집단을 다르게 지각하고 그들에 대해 독특한 정서를 느끼고 그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혐오'라는 두 글자에 쓸어담는 것은 위에 쓴 것처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현상의 복잡다단한 양상들을 잘 분류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각각에 적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외집단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들에는 혐오(역겨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외에도 증오(hatred를 가리키는, 어쩌면 더 적절한 번역어), 동정, 경멸/멸시/비하, 무관심, 적대감 등이 있고, 행동은 공격, 착취, 무시, 조롱, 괴롭힘, 따돌림/배제/소외, 보호, 우대 등이 있다. 아래의 글에서는 내 주장과 비슷하게 '적대적 성차별주의'에만 '(여성) 혐오'라는 말을 사용하고, '온정적 성차별주의'에는 혐오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성차별주의'(sexism)라는 말을 쓰자고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사회심리학에서도 '편향', '고정관념', '편견', '차별', '낙인' 말고는 다른 표현들이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일반적인 원리의 발견을 추구하는 학문 분야의 지향성 때문이므로 이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외집단에 대한 취급의 여러 다른 양상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잘 구분하고 이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번역이 잘못된 글을 읽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엉터리 문장을 읽으면 불쾌하고, 번역가의 성의 없고 뻔뻔한 자세에 화가 나고, 미국 심리학에 종속돼 있는 한국 심리학계의 현실에 갑갑함을 느끼고, 한국의 영세한 출판 시장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다. 정말 읽기 힘들 정도로 번역의 질이 낮은 책은 요즘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런 책은 사 놓고 결국 안 보게 된다.
문제는 꼭 봐야 하는 책, 예를 들어서 교과서의 번역이 잘 안 되어 있을 경우이다. 유감스럽게도 심리학 교과서 번역본들은 문제가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다. 우리 과에서는 전공 개론 시간에 보는 교과서를 번역에 매우 문제가 많은 책으로 몇 년 보고 있다가(차마 어디 책이라고 말은 못하겠다.)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올해 다른 책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미안하게도 이 책도 큰 차이가 없다(역시 이 책도 어디 것이라고 말 못 하겠다…). 원문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문장도 문장이지만, 명백한 오류나 원문에도 없는 초월 번역도 많고 심지어는 분명히 번역자분들의 전공 분야인데도 너무도 분명하게 틀리게 옮긴 것들도 왕왕 있는 것이 놀랍다. 엉터리로 번역된 전공 서적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냥 설렁설렁 읽으면 대충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문장 단위로 해석을 하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번역하신 분들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 한 채로 본인의 전공 지식을 동원해서 맥락상 연결이 되게 어물쩍 옮기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백 번 양보해서 대중 교양서라면 그렇게 대충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허용이 될 수도 있겠다만, 전공 서적을 그런 식으로 써서 학생들이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고 읽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너무 화가 난다. 그뿐 아니라 우리 과에서 보고 있는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나라도 뭔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앞으로 이 책을 보다가 내가 찾은 번역의 잘못된 점들을 내 웹사이트에 정리하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이나 이 책으로 공부를 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알게 된다면 이걸 보고 번역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꿈꾸는 것은 한국심리학회에서 여러 분들의 지혜를 모아서 함께 책을 하나 쓰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 미국의 대중문화의 참조, 미국 사람들의 사진과 카툰으로 가득한 책을 맨날 읽히는 것은 학생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심리학자들이 재능 기부로 조금씩 힘을 합쳐서 책을 만든다면 돈도, 노력도 적게 들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적은 인쇄비만 받거나 아예 그냥 pdf 파일을 무료로 공개하는 방식을 써서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 사정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본다. 한 줄 요약: 금전적 보상의 요구는 도덕적 책임의 요구보다 더 '낮은'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강남역 사거리를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현수막을 설치하시는 분들이 보였다. 여기는 삼성타운이 있기 때문에 삼성 관련 시위를 하거나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늘상 볼 수 있다. 이 현수막도 그런 것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현수막은 아저씨와 아주머니 몇 분이 걸고 계셨는데, 그 중 아저씨 한 분은 군인 기분을 내고 싶으셨던 것인지 베레모를 쓰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다. 그걸 보니 대충 이 분들의 소속에 대한 감이 왔다. 알고 보니 근처에 있는 노란 현수막은 전부 이 분들이 거신 것들이었다. 이 분들이 삼성에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 현수막은 삼성에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삼성에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옆에 있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이었다. 옆의 현수막의 내용은 - 나도 현수막의 글만 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 삼성과 관련한 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서 항의를 하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 "돈 달라는 소리죠?"라면서, 결국 돈 요구하는 것 아니냐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즉 말하자면 '너희들이 그렇게 고고한 척 하지만 너희들도 결국 돈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위의 진짜 '속셈'을 밝혀서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막으려는 것이 이 현수막의 의도인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 점은 '돈 달라는 소리'라고 하면 시위의 목적이 뭔가 불순하고 천한 것처럼 느껴질 것을 노리고 이런 현수막을 걸고 계신 것 같은데, 왜 그게 불순하고 천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건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이재용 회장이 울면서 싹싹 빌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러면 피해에 대해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히 금전적인 배상 아닐까? 그게 잘못일까? 생각해 보면 이건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에 가해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관한 암묵적인 가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피해를 입었을 때, 당신은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한테 손해를 끼치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봐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손해를 메꾸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사과와 재발 방지의 약속을 계속 요구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이웃 나라로 지내야 하므로 앞으로 믿고 교류를 해도 되는 상대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회사와 같이 법적으로만 얽혀 있는 사이라면 그런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할 필요도 없고 그럴 여지도 없다. 그러므로 피해에 대해 금전적인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고, '너희들 잘못했다고 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고 요구하는 것은 훨씬 부차적인 일이 된다. 그러니 배상의 요구를 조롱하고 약올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돈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들 돈 달라고 하는 거지?'라고 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아마도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요구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상황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사건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위를 하시는 분들도 문제를 금전적인 차원의 것으로 프레임하지 않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시위를 반대하는 분들도 그런 측면을 더 공격을 하게 되는 것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경원시하는 것(또는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금전적인 배상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 시위가 '덜 순수한' 것이라거나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더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당사자들이나 제3자들 모두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하거나, 포장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하는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국가 권력 앞에 학자의 양심은 저버린 채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화가 나면서도 짠하다. 참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구나...
학교도 잘 한 것 하나 없지만, 당연히 책임은 당사자가 가장 무겁게 져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스스로 학위 논문을 철회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철회라는 절차가 공식적으로 있는지도 사실 상관이 없고 그냥 말로 선언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학교의 체면도 세워 주고 수십 만 명의 학교 구성원들이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치더라도, 본인과 본인 배우자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도 높아지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므로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표절을 인정한다고 배우자의 당선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고위공직자의 가족이라고 국민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법적인 의무는 없고 도덕적인 의무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상식 수준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예쁜 옷 입고 사진찍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나? 옆에서 아무도 말 안 해 주나? 도사님들은?? 이런 '판단의 오류'가 개인차적인 변인들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상황 변인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것과 저~ 위에서 판단을 하는 것은 1) 권력의 유무, 2) 당사자냐 관찰자냐의 차이가 있다. 이런 변인들이 가치에서의 우선 순위나 가중치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요즘 큰 화제를 모으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나도 조금씩 보고 있다. 자폐인을 정확히 묘사하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니 그 점에서는 뭐라고 평가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적에서는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을 거라고 치고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얘기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쓰고 보니 해답보다는 질문만 잔뜩 더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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