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이 공익광고를 많이 틀어주고 있다. 나는 이 동영상을 볼 때마다 과연 이 동영상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지 의문이 든다.
여러분들은 이 동영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내가 했던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반면 마약을 하면 청춘도 건강도 젊음도 인생도 끝난다는데, 어떻게 끝난다는 건지, 왜 끝난다는 건지, 끝난다는 게 뭘 뜻하는 건지('끝내준다'와 '끝난다'가 유사해서 의미도 서로 헷갈린다.) 아주 모호하게만 묘사되고 있다. 하다 못해 그 흔한 공포감 조성도 없다. 이 광고를 만든 분들은 포커스 그룹을 데리고 실험을 해 보았을까?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을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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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나 행동을 좋다/싫다(또는 좋다/나쁘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예를 들어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다든가,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도운 의인의 행동을 칭찬하는 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냥 좋다, 싫다라고 표현했을 때는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말 뒤의 함의 또한 모호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대도시의 시장이 '나는 퀴어축제를 반대한다'라고 했다면(홍준표 "대구 '퀴어축제' 용납 어려워…다른 곳에 가서 하라") 그건 무슨 의미일까?
호불호에 대한 말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범주를 사용하면 어떨까? 나는 좋고 싫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았다.
이러한 분류를 사용하면 다양한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발언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퀴어축제와 관련한 논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바바리맨 축제는 어떤가? 제목부터가 매우 과격한데, 이 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에 대해 동등한 표현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첫 번째 기사에 따르면 홍 시장은 “1%도 안되는 성 소수자의 권익만 중요하고 99% 성 다수자의 권익은 중요하지 않냐”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 역시 성 소수자가 자신의 성 지향성을 표현하는 것과 성 다수자가 성 소수자의 성 지향성 표현을 싫다고 말하는(또는 생각하는) 것을 동등하게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말은 한 발 더 나아가 후자가 더 다수이므로 후자를 더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분류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게 된다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으므로 덜 소모적이고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분류법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다양한 심리학적인 연구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뉴스가 나왔을 때는 대부분의 댓글이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기억하는데, 그래도 나는 이게 일종의 넛지로서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1) 이런 방법으로 퇴사를 막기에는 일이 너무 고되다. 2) 어차피 나무 심는 것도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 강제로 시킨 것이다. 라는 (매우 큰) 두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 애착을 갖도록 하는 데 조금은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은 어쩌면 의사결정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 있으므로 2)만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사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정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꽤 괜찮았을 수 있었을 아이디어를 이렇게밖에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이 정도 조치는 아무 도움도 안 됐을 정도로 사회에 만연한 냉소주의가 안타깝다. 이런 장벽은 실제 넛지 전략을 적용할 때도 부닥칠 수 있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Research Rabbit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도구가 얼마 전에 나왔다. 어떤 연구 주제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면 어떤 학자, 또는 그 학자와 공동 연구를 한 학자들의 논문들을 검색을 하게 되는데 이 도구는 그 과정을 보다 간단하게 해 주고 있다. 즉 어떤 학자 이름을 검색하면 그 사람이 출판한 논문들과 공동 연구를 한 학자들을 마인드 맵과 같은 모양으로 화면에 제시해 주어서 관련 논문들을 바로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게다가 관련 있어 보이는 논문들을 추천도 해 주고, 결과를 curate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공동 연구를 위한 기능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욕심을 많이 낸 도구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무료다. 나는 일단 쓰던 도구들이 있고, 너무 많은 기능이 들어 있는 도구는 왠지 안 쓰게 된다. 하지만 분명 이런 도구가 도움이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도구들이 계속 개발이 되면 좋겠다. 한 줄 요약: 낙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을 대신 물어봐 주고 답을 받는다.
마영신 그래픽노블 ‘엄마들’, ‘만화계 오스카’ 수상 엄청 뒷북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화 중 하나인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이 만화계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광을 얻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초기 노년기의 여성들의 삶을 마치 직접 들여다보듯이 생생하게 묘사하여,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 인간 삶의 일면을 조명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작가가 어떻게 이런 내용들을 조사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회적인 낙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줄이려면 그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기에는 불편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장난으로 당사자가 아닌데 당사자 행세를 하면서 거짓 지식을 퍼뜨리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번거롭더라도 사이트 관리자가 당사자가 실제 그 집단의 구성원인지를 직접 확인하는 절차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한 줄 요약: 가해자를 대표하지 못하는 사람의 사과의 효과는 어떠할까?
전두환 손자, 광주서 ‘임을 위한 행진곡’ 불러…유족 “잘 왔다” "이젠 됐다 할 때까지 사죄"…日기독교계 양심 오야마 목사 별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주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조부의 악행에 대해 사과를 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한편 일본 사람들 중에도 전체 사회의 여론과 다르게 한국인들에게 반복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양심과 용기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해자 집단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는 것은 집단 간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보다 구체적으로 피해자 집단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받고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즉 사과의 효과가 있을까? 실제로 어떨지는 실험을 해 봐야겠지만 사과의 효과가 있는 이유도 있고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우원씨나 일본의 양심 있는 분들의 사과의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사과의 효과는 가해자 집단 전체에 일반화되지는 않을 것이고 피해자들은 완전히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진심으로 피해자 집단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노력을 하는 것은 피해자 당사자들이나 제3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분들의 사과가 보다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연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집에 사흘 방치돼 숨진 20개월 아기…옆엔 김 싼 밥 한 공기뿐
어린이나 아기들이 어른들의 학대와 무관심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만큼 마음 아픈 것도 없다. 하지만 책임 있는 시민이라면 이런 기사를 읽고 슬퍼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죄책감과 분노를 느껴야 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확히 연구된 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집에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사망하는 일은 최근에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아마도 코로나 이후로 집에서 가족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도 늘어난 것이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아동 학대를 점점 더 '있을 수도 있는 일'로 여기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사건들이 보도가 되는 방식이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즉 아동 학대 사건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면, 그러한 사건의 잘잘못과 별도로 그 발생 빈도를 높게 지각하게 되고, 그 결과 그런 일이 마치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같이 사회적 규범을 잘못 지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때 자동적으로 아동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이 활성화되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책은 뭐가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 방법은 언론의 보도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아동 학대에 대한 보도를 제한하거나, 학대의 구체적인 내용을 묘사하는 것을 제한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자살에 대한 보도에서 많은 제한을 두는 것과 같이 보도를 아예 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정보만 보도하도록 한다면, 학대의 구체적인 양상이 머릿속에 가용하지 않을 것이므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다. - 기사 말미에 아동 학대시 받을 수 있는 처벌의 내용을 넣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동 학대를 할 경우 체포되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에 대한 내용이 기사에 바로 이어진다면, 학대의 충동을 느끼더라도 그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혐의만 가지고 언론이 판결을 내리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의 벌을 받게 될 수 있다'라는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 된다면 문제도 되지 않고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부모의 양육에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로서 아동을 학대한다는 것은 너무 엄청난 잘못이고 거의 인간이길 포기한 행동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저 무조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금기시하고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아동 학대의 유혹에 누구든 빠질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런 순간에 어떻게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효과적인 예방 및 대처 전략을 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예를 들어, 아동의 출생이나 입양, 또는 결혼으로 아동의 양육자가 되었을 때 아동 학대에 대한 소책자를 나눠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자에는 아동 학대의 충동이 느껴질 때 그러한 충동을 스스로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적을 수 있다. 또한 여기에도 아동 학대가 중죄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면 예방의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 줄 요약: 태도는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늘도 다양한 사회 집단들은 거리에서, 또는 온라인 상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주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가운데 가끔 난감한 일이 생기는 것은, 사실은 그 정치적인 주장이 누군가 사악한 의도를 가진 세력에 의해서 선동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이다. 그 '누군가'는 대개 북한이지만, 때로는 중국 정부가 배후로 지목이 되기도 한다(예: 한국의 양성 간 갈등 조장). “세월호처럼 분노 분출시켜라” 北, 핼러윈 뒤 민노총에 지령 태영호 "北서 배웠다, 4·3은 김일성이…"→ 진중권 "3·1운동도 그리 말할 테냐" ('지령'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뉴스에서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이다. 이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서 자신의 부하에게 비밀스러운 지시를 내리면,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들이 이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종당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담겨 있다.) 특히 그 주장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일수록 충격이 더 큰 것 같다. 이렇게 어떤 정치적인 주장이 사실은 누군가 외부인의 조종을 당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게 되면, 그 주장을 하는 집단의 도덕적 정당성은 크게 타격을 입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치 장기판의 말처럼, 또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선동에 의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좀비처럼 지각되기도 한다. 특히 집단의 실체성(entitativity)이 높게 지각되는 집단일수록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전부 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조종당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 당사자들이나 그들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런 선동 주장에 대해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4.3 사건에 관한 태영호 의원의 주장에 대해 진중권씨나 류호정 의원이 보인 반응처럼 말이다. 정치적 운동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주장 때문에 그 정치적 운동의 주체들이 폄하되는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절감의 원리(discounting principle)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들이 그런 태도를 가진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내적인 원인(자신의 가치관, 신념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외적인 원인(선동, 조작)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면 내적인 원인이 가지는 설명력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외적인 원인에 의한 설명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는 함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상대편 진영의 사람에게는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태도를 가지고 있고, 그런 태도를 각자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소유물 또는 그 사람의 창조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진공 상태에서 스스로 태도를 형성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모두 크든 작든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태도가 얼마나 '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태도가 '나'를 정의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질까? 우리 자신이든 다른 사람들이든, 누군가가 가지는 태도가 남들에 의해 쉽게 영향받을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 태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즉 스스로 형성한 것인지 남들에 의해서 주입된 것인지)에 지나치게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신념을 가진 분들에 대해 사람들이 지각하는 의지와 주체성의 훼손 없이 그 분들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예를 들어 정말로 북한이 핼러윈 참사 이후에 소요를 일으키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서 평가해야지 무조건 북한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매도하고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길로 가기를 바라면서 외치는 여러 목소리들 중 하나-어쩌면 올바른 목소리일 수 있는-에 귀를 닫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줄 요약: 온라인 모임에서 다 같이 동기화된(synchronized)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모임에의 참여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온라인 모임을 주최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 모임은 아는 사람들과 해도 어색한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갑자기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함이 한층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한 대로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대면으로 만나는 것에 비해 더 어색하고, 불편하고, 피곤하고, 더 '차가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훨씬 덜하다는 편리함도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 마스크를 덜 쓰게 되더라도 비대면 모임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어떻게 하면 온라인 상에서의 만남이 덜 껄끄럽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그 모임에서 속으로 땀을 흘리면서 진행을 하다가 문득 생각을 한 것은, 무언가 다 같이 동기화된(synchronized) 행동을 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박자를 맞춰서 같은 동작을 취한다든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친다든지? 이러면 좀 웃기기도 하니까 분위기도 부드러워질 수 있고, 다 같이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너무 이상하고 엉뚱한 생각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미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런 동기화된 행동을 하는 시간이 포함되곤 했다. 국민의례(또는 모임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는 민중의례)라는 이름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또는 집회에서 다 같이 구호를 외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동기화된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 왔던 것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된' 느낌을 갖게 되고(Lakens & Stel, 2011), 긍정적인 정서를 더 많이 경험하며(Paez et al., 2015), 앞으로도 그 모임에 참여하고자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Wheatley et al., 2012). 그렇다면 온라인 모임에서도 앞부분에 그런 절차를 넣으면 어떨까? 다 같이 간단한 춤을 춘다든지, 구호를 넣는다든지? 박자를 딱 맞춰야지만 다음 순서로 이어질 수 있게 한다면 참가자들이 좀 더 노력을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일체감도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이 쑥스럽겠지만, 그 쑥스러움이라는 (매우 개인적인)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감을 증진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모임에서는 한 번 시도를 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한 줄 요약: '혐오'라는 말을 좀 가려 쓰자.
요즘은 혐오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 내의 많은 집단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언어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 같다. 과연 정말로 사람들이 지난 시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을 더 싫어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만 느껴지는 건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인터넷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정제되지 않은 말이 더 많아진 건 아닐까? 사람들이 더 솔직해진 건 아닐까? 지역주의나 '노골적인'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는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혐오'라는 표현 자체가 지나치게 많이 또는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연 혐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말이 옳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해 보고자 한다. 내가 혐오라는 단어가 남용, 오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단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혐오'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싫어하고 미워함'이라고 뜻이 적혀 있다. '嫌'은 싫어한다는 뜻이고 '惡'는 미워한다는 뜻이니 단어를 있는 그대로 옮긴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니다. '혐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처음 나오는 단어가 'hatred', 둘째 단어는 'disgust'이다. disgust는 hatred와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싫어함'이라는 뜻 외에 '역겨움'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징그럽거나 끔찍한 무언가를 보면 역겹고 속이 울렁거릴 수는 있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하는 건 그다지 적확하지 않은 것 같다. 정서로서도 이 둘은 서로 다른 정서로 분류되고 있다(disgust와는 달리 hatred는 기본 정서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문제는 혐오에 대한 많은 글을 보면 이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거나, 글마다 다른 것을 의미하거나, 심지어는 두 의미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혐오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맥락이 '혐오 표현'인데, 이는 영어의 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그렇다면 줄곧 hate의 의미로 생각을 하면 되겠지만, 다음의 글들처럼 글 중간에 의미가 바뀌는 경우들이 있다.
2. 이 단어는 현상을 과장된 형태로 표상하고 있다. hate, 즉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맥락들만 보더라도 '이게 정말 혐오라고 말할 정도인가?'라고 의아하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있다. 다음의 글들에서는 대상을 정말 강하게 싫어하는 것이 명백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혐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반면 다음의 경우들은 '혐오'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맥락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모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맥락에서 혐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생각과 정서, 행동을 '여성 혐오'라고 일컫는 것은 일본 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줄여서 '여혐'이라고 하면 간편하고 입에 착착 붙다 보니 그 번역이 적절할지 고민도 해 보기 전에 널리 퍼져서 사용되고 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여배우'라는 말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개념의 의미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성 혐오'의 준말은 '혐여'가 돼야 하지 않을까? 한문에서는 영어처럼 문장 성분들을 '주어+술어+목적어'의 순서로 나열하니 말이다. '혐중', '혐한', '반일', '친일'과 같이 말이다. '여혐'은 엄밀히 말하면 '여자가 싫어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미 말이 언중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서 '혐여', '혐남'이라고 고쳐 나가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한 집단에 대한 모든 종류의 편향을 '혐오'라는 말로 아울러서 말하는 것은 대상이 여성인 경우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여성 혐오'라는 말이 퍼지면서 혐오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그렇게 이것저것 다 담는 것으로 오염이 돼 버린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 어떤 경우에는 '혐오'라고 인정되기 위해서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 혐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4. 대상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 느낌, 행동을 '혐오'라고 하는 것은 게으른 자세다. 위에서 본 사례들에서와 같이 '혐오'를 광범위한 현상들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 있다. 즉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특정해야 하는 부담 없이 간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편향이 발현될 수 있는 수많은 양상들을 무시하고 마치 단일한 현상인 것처럼 말하게 하므로 무엇이 문제인지, 그 원인과 결과, 해결책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럼 혐오 말고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혐오라는 표현이 적절한 맥락도 매우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집단을 다르게 지각하고 그들에 대해 독특한 정서를 느끼고 그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혐오'라는 두 글자에 쓸어담는 것은 위에 쓴 것처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현상의 복잡다단한 양상들을 잘 분류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각각에 적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외집단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들에는 혐오(역겨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외에도 증오(hatred를 가리키는, 어쩌면 더 적절한 번역어), 동정, 경멸/멸시/비하, 무관심, 적대감 등이 있고, 행동은 공격, 착취, 무시, 조롱, 괴롭힘, 따돌림/배제/소외, 보호, 우대 등이 있다. 아래의 글에서는 내 주장과 비슷하게 '적대적 성차별주의'에만 '(여성) 혐오'라는 말을 사용하고, '온정적 성차별주의'에는 혐오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성차별주의'(sexism)라는 말을 쓰자고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사회심리학에서도 '편향', '고정관념', '편견', '차별', '낙인' 말고는 다른 표현들이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일반적인 원리의 발견을 추구하는 학문 분야의 지향성 때문이므로 이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외집단에 대한 취급의 여러 다른 양상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잘 구분하고 이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올해 톡소포자충(Toxoplasma gondii)이라는 기생충이 야생의 늑대들을 더 대담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리더가 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가 발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Parasitic infection increases risk-taking in a social, intermediate host carnivore).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톡소포자충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온혈동물들을 감염시켜 위험추구 행동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많은 연구에 의해 밝혀져 있었다. 2018년에 나온 다른 연구에서는(Risky business: linking Toxoplasma gondii infection and entrepreneurship behaviours across individuals and countries) 이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람들이 경영학을 전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개인 수준뿐 아니라 문화 수준에서도 나타남이 관찰되었다. 어떤 원리로 이렇게 되는 것인지는 아직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조절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잘 알려진 연가시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하등 동물들의 행동이 기생충 등의 외부 요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비교적 익숙하다. 하지만 스스로 고등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행동조차도 이런 요인들의 영향 하에 있다는 생각은 훨씬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활동이 결국은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전달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기생충들 또한 인간을 포함한 고등 동물들을 셔틀처럼 사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조금 쉬워질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을 좀 더 겸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지난 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현대 문명의 풍요를 가져다준 자본주의도 부분적으로 이런 기생충의 영향 하에 발생하고 유행했던 것 아닐까? 한 발 더 나아가, 어쩌면 톡소포자충은 인간이 더 대담해지도록 진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아닐까? 대담한 성향이 사람들을 더 멀리 퍼져 나가게 만들고, 모험이 성공했을 때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더 퍼트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럼으로써 기생충의 숙주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그런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www.frontiersin.org/articles/10.3389/fpsyg.2015.01100/full
부지런한 학자들이 무려 50가지나 되는 잘못 사용되고 있는 심리학 표현들을 정리했다. 이들은 이런 표현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 1. 정확치 않거나 오도하는 표현들: operational definition, reliable and valid 등 2. 흔히 잘못 사용되는 표현들: closure, denial 등 3. 애매한 표현들: comorbidity, interaction 등 4. 모순적 표현들: observable symptom, personality type 5. 겹말들: empirical data, latent construct 등 어떤 것들은 너무 엄격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숙지하고 더 엄밀한 표현을 쓰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한 번 읽어볼 만한 글이다. 한 줄 요약: 과격한 비유는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가난 포르노'라는 말이 몇 주째 정치권에서 논란이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생활과 관계 없는 일을 갖고 서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말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뉴스면을 장식하는 데에는 뭔가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옛날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었을 때 '정신적 테러'라는 표현을 처음 보고 참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테러'라고 하면 뭔가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강렬한 장면이 그려지는데, 사람들의 마음에 테러를 일으킨다고 하니 그만큼 정신적인 피해가 크다는 느낌이 확 와 닿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비유는 강한 이미지와 정서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저자의 뜻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서로 직접 관계가 없는 개념들끼리 연결을 시키는 데서 오는 문학적인 쾌감도 있다. 그래서 일상 대화나 설득, 정치의 맥락뿐 아니라 학술적인 맥락에서도 이런 비유적 표현이 왕왕 쓰이는 것 같다. 이번에 사용된 '포르노'라는 말도 food porn, inspiration porn 등 여러 가지 말에 붙어서 쓰이고 있다. 그 밖에 '시선 강간'이니 'food desert'니 하는 표현들도 최근에 쓰이고 있고, '인격 살인'이라든가 '노예 계약'과 같은 말은 예전부터 많이 사용돼 왔다. 문제는 그 표현이 환기하려는 이미지와 정서가 지나치게 강렬하면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기능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 포르노'를 예로 생각해 보자.
결론적으로 이런 과장된 비유 표현을 쓰는 것은 좀 지양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더 큰 임팩트를 남기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이해는 하겠으나,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런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쓴다면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주의가 산만해지고 인지적, 정서적으로 피로해진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 공해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말도 과장된 비유 표현이므로 나부터 자제해야 하겠다. 예상했던 대로 책임을 느껴야 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책임 회피를 하느라고 바쁘다. 한편으로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영혼 없는 사과와 책임 인정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사과가 국민의 공분을 희석시키고 그때그때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과가 지나치게 사용되지 않는 것만큼, 남용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해소되고 있다거나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사건에서 진정으로 무언가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적인 책임 소재는 수사와 재판의 과정을 통해 찾을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지 밝힐 수 있으려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기 보존을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의 잘못은 남에게 떠넘기고 태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어떻게 하면 더 적극적으로 책임 인정과 진상 규명에 나서게 할 수 있을까?
이번 일은 - 지나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 유난히 일이 잘못될 조짐이 많았다.
물론 책임을 질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정도의 참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이 발생할 것 같으면 과할 정도로 대비를 해 놓았어야 할 것이다. 하나 둘 나오고 있는 여러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면 용산구청과 경찰 등 당국이 가지고 있었던 안일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 * * 내가 만일 이런 상황에 처해 있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번 일은 한편으로는 워낙 특이한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듯이 전철 객차 안이나 승강장 등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서울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워낙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는 점과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 빠르고 차분하게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점, 나 역시도 개인으로서보다는 무리 중의 일부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거라는 점,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쉽게 묻혀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번역이 잘못된 글을 읽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엉터리 문장을 읽으면 불쾌하고, 번역가의 성의 없고 뻔뻔한 자세에 화가 나고, 미국 심리학에 종속돼 있는 한국 심리학계의 현실에 갑갑함을 느끼고, 한국의 영세한 출판 시장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다. 정말 읽기 힘들 정도로 번역의 질이 낮은 책은 요즘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런 책은 사 놓고 결국 안 보게 된다.
문제는 꼭 봐야 하는 책, 예를 들어서 교과서의 번역이 잘 안 되어 있을 경우이다. 유감스럽게도 심리학 교과서 번역본들은 문제가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다. 우리 과에서는 전공 개론 시간에 보는 교과서를 번역에 매우 문제가 많은 책으로 몇 년 보고 있다가(차마 어디 책이라고 말은 못하겠다.)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올해 다른 책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미안하게도 이 책도 큰 차이가 없다(역시 이 책도 어디 것이라고 말 못 하겠다…). 원문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문장도 문장이지만, 명백한 오류나 원문에도 없는 초월 번역도 많고 심지어는 분명히 번역자분들의 전공 분야인데도 너무도 분명하게 틀리게 옮긴 것들도 왕왕 있는 것이 놀랍다. 엉터리로 번역된 전공 서적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냥 설렁설렁 읽으면 대충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문장 단위로 해석을 하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번역하신 분들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 한 채로 본인의 전공 지식을 동원해서 맥락상 연결이 되게 어물쩍 옮기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백 번 양보해서 대중 교양서라면 그렇게 대충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허용이 될 수도 있겠다만, 전공 서적을 그런 식으로 써서 학생들이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고 읽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너무 화가 난다. 그뿐 아니라 우리 과에서 보고 있는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나라도 뭔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앞으로 이 책을 보다가 내가 찾은 번역의 잘못된 점들을 내 웹사이트에 정리하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이나 이 책으로 공부를 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알게 된다면 이걸 보고 번역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꿈꾸는 것은 한국심리학회에서 여러 분들의 지혜를 모아서 함께 책을 하나 쓰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 미국의 대중문화의 참조, 미국 사람들의 사진과 카툰으로 가득한 책을 맨날 읽히는 것은 학생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심리학자들이 재능 기부로 조금씩 힘을 합쳐서 책을 만든다면 돈도, 노력도 적게 들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적은 인쇄비만 받거나 아예 그냥 pdf 파일을 무료로 공개하는 방식을 써서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 사정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본다. 한 줄 요약: 금전적 보상의 요구는 도덕적 책임의 요구보다 더 '낮은'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강남역 사거리를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현수막을 설치하시는 분들이 보였다. 여기는 삼성타운이 있기 때문에 삼성 관련 시위를 하거나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늘상 볼 수 있다. 이 현수막도 그런 것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현수막은 아저씨와 아주머니 몇 분이 걸고 계셨는데, 그 중 아저씨 한 분은 군인 기분을 내고 싶으셨던 것인지 베레모를 쓰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다. 그걸 보니 대충 이 분들의 소속에 대한 감이 왔다. 알고 보니 근처에 있는 노란 현수막은 전부 이 분들이 거신 것들이었다. 이 분들이 삼성에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 현수막은 삼성에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삼성에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옆에 있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이었다. 옆의 현수막의 내용은 - 나도 현수막의 글만 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 삼성과 관련한 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서 항의를 하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 "돈 달라는 소리죠?"라면서, 결국 돈 요구하는 것 아니냐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즉 말하자면 '너희들이 그렇게 고고한 척 하지만 너희들도 결국 돈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위의 진짜 '속셈'을 밝혀서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막으려는 것이 이 현수막의 의도인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 점은 '돈 달라는 소리'라고 하면 시위의 목적이 뭔가 불순하고 천한 것처럼 느껴질 것을 노리고 이런 현수막을 걸고 계신 것 같은데, 왜 그게 불순하고 천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건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이재용 회장이 울면서 싹싹 빌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러면 피해에 대해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히 금전적인 배상 아닐까? 그게 잘못일까? 생각해 보면 이건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에 가해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관한 암묵적인 가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피해를 입었을 때, 당신은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한테 손해를 끼치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봐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손해를 메꾸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사과와 재발 방지의 약속을 계속 요구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이웃 나라로 지내야 하므로 앞으로 믿고 교류를 해도 되는 상대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회사와 같이 법적으로만 얽혀 있는 사이라면 그런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할 필요도 없고 그럴 여지도 없다. 그러므로 피해에 대해 금전적인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고, '너희들 잘못했다고 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고 요구하는 것은 훨씬 부차적인 일이 된다. 그러니 배상의 요구를 조롱하고 약올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돈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들 돈 달라고 하는 거지?'라고 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아마도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요구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상황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사건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위를 하시는 분들도 문제를 금전적인 차원의 것으로 프레임하지 않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시위를 반대하는 분들도 그런 측면을 더 공격을 하게 되는 것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경원시하는 것(또는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금전적인 배상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 시위가 '덜 순수한' 것이라거나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더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당사자들이나 제3자들 모두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하거나, 포장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하는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한 줄 요약: 투표 전에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내가 투표를 한 정치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만큼 실망스러운 일도 별로 없다. 반대로 내가 지지하지 않은 정치인이 당선되고 나서 일을 잘 못할 때는 '그럴 줄 알았다. 이제 제대로 망하는 꼴이나 봐라.'라고 고소한 마음이 들겠지만, 그것도 결국 한 국민으로서 참 허망하기 찍이 없는 감정일 것이다. 선거 후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유권자들 각자 자신이 최선을 다 해서 판단하고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올바른 판단에 필요한 정확한 정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만큼만 제공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맡기려면 그들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마치 직접 만나서 면접을 한 것처럼, 대부분의 관심 있는 국민들이 '이 정도면 아무개에 대해 알아야 할 만큼 알게 되었다'라고 느낄 만큼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들이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 대해서, 또는 적어도 자식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 대해서 아는 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는 정치인들의 행동들 중에 그들에 대해 정말 잘 알게 되었다고 느꼈던 인상적인 행동들은 다음의 것들이다.
이에 반해 어떤 정치인이 무슨 가방을 들고 다닌다느니, 고개를 도리도리했다느니, 말할 때 쩝쩝 소리를 낸다느니 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그 사람의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말해 주는 정도가 훨씬 적은 피상적인 측면들일 것이다(모르겠다. 패션은 그 사람의 허영심이나 남들의 시선에 신경쓰는 정도를 나타내고, 고개를 도리도리하거나 쩝쩝 소리를 내면서 말하는 건 자기가 하는 말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까??? 아마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이런 것들보다는 훨씬 영양가 있는 측면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대안적인 측면들에 더 많은 방송 시간을 할애하고, 정치 행위의 맥락 전체에서도 그런 측면들이 더 노출되도록 설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그들이 직접 쓴 글을 읽고(직접 썼음을 인증해야 함), 그들의 일상 생활을 엿보고, 질문에 답을 하게 하고, 심지어는 상황극 같은 것을 해서 어떤 상황에서 보일 반응을 관찰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달리 말하면 선거 운동을 구태의연한 유세 같은 것으로 채우게 하지 말고 국민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예상된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개발을 위한 2단계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 1) 정치인으로서의 수행을 잘 예측하는 개인적 특성들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MBTI 같은 것 말고 더 타당하고 설명력이 높은 도구를 이용해서 연구한다.
2) 그 특성들의 차원에서 정치인들을 평가하는 데 유용한 방법들을 개발해서 유권자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고 판단하게 한다.
덧붙여서, 정보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 정보에 개인들이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자신의 가치 기준에 맞게 취합하여 최종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항목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즉 얼마나 각 항목들에 가중치를 둘지) 등의 규칙을 미리 정하고 후보들이 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몇 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일괄적으로 계산해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일들에 대해 더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되도록 선거일로부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시점에서 각 항목들의 중요성을 평정하게 한다면 지엽적인 요소들이 아닌 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판단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아이디어에 대하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제공되고 그 정보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정의된다면, 정치인들은 평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가식과 위선을 떨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인지적 부담이 높은 상황, 즉 갑작스럽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나 매우 피곤한 때에도 바람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려면 평소 마음가짐을 더 그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자신의 검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면 애초부터 검은 마음을 먹지 않으면 될 것이므로, 더 이타적이고 편견 없이 국민에 봉사하는 마음을 내면화하게 되지 않을까. 흠… 오늘도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이 난다. 국가 권력 앞에 학자의 양심은 저버린 채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화가 나면서도 짠하다. 참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구나...
학교도 잘 한 것 하나 없지만, 당연히 책임은 당사자가 가장 무겁게 져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스스로 학위 논문을 철회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철회라는 절차가 공식적으로 있는지도 사실 상관이 없고 그냥 말로 선언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학교의 체면도 세워 주고 수십 만 명의 학교 구성원들이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치더라도, 본인과 본인 배우자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도 높아지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므로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표절을 인정한다고 배우자의 당선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고위공직자의 가족이라고 국민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법적인 의무는 없고 도덕적인 의무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상식 수준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예쁜 옷 입고 사진찍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나? 옆에서 아무도 말 안 해 주나? 도사님들은?? 이런 '판단의 오류'가 개인차적인 변인들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상황 변인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것과 저~ 위에서 판단을 하는 것은 1) 권력의 유무, 2) 당사자냐 관찰자냐의 차이가 있다. 이런 변인들이 가치에서의 우선 순위나 가중치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요즘 큰 화제를 모으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나도 조금씩 보고 있다. 자폐인을 정확히 묘사하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니 그 점에서는 뭐라고 평가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적에서는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을 거라고 치고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얘기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쓰고 보니 해답보다는 질문만 잔뜩 더 만든 것 같다.
한 줄 요약: 드라마 등에 소수 집단 구성원들을 더 등장시켜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에 더 친숙해지게 한다.
예전에 소수 집단 구성원들이 미디어에 더 많이, 충분히 대표되도록 만들려면 어떡해야 하나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만나보기 힘든 사람들, 또는 일상 생활에서는 아주 한정되거나 부정적인 맥락으로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을 미디어를 통해서라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면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되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는 시청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쪽으로 내용이 구성되므로 소수 집단 사람들을 억지로 출연시킨다는 것은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본 아이디어 중에 하나는 등장 인물들 중 일부를 소수 집단 사람으로 등장시키기 위해 마치 일종의 PPL처럼 미디어 프로그램에 금전적 지원을 하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 중 한둘을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청소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금전적 지원은 해당 집단들의 권익 단체나 기타 그들의 복지를 촉진시키기를 원하는 주체들이 담당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정부도 그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공익적인 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런 일을 위해 돈이 오간다는 것에서 도덕적인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돈을 써서라도 소수 집단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사회의 통합을 위해 무엇이든 일을 하려면 돈이 들게 되므로 이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소수 집단 사람들을 드라마 등에 등장을 시키는데 있어서 그들만의 특징이 두드러지도록 하기보다는 그들도 '우리'(다수인들)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한 인물이 그 소수 집단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이야기의 중요한 장치인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 중 한 명인데 마침 그 집단에 소속된 경우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실의 한 학생이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서 놀림을 받는다는 진부한 내용보다는 그냥 여러 학생들 중에 일부가 다문화 가정 출신으로 묘사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드라마에 노출되다 보면 특정 상품에 대한 친근감이 높아지듯이 특정 집단 사람들에 대해 더 친근감을 느끼고 그들과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바람직한 비차별적 행동을 간접 학습하게 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소수 집단에 대한 PPL은 '우리'(다수 집단 구성원들)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사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이려는 목적이 있는 경우에 더 유용할 수 있다. 소수 집단 구성원들을 더 대표시키기 위해 드라마 등에 등장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들이 가진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가 되면 시청자들이 기존의 편견 때문에, 또는 시청자를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치킨 PPL에서 등장 인물들이 굳이 "이 치킨 정말 맛있네!" 하면서 노골적인 광고를 하면 거부감이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 대신에 그들의 특징이 이야기와 전혀 관계가 없다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게 그들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어떤 소수 집단 구성원들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 너무 모르고 있는 경우에, 또는 소수 집단 구성원들이 가지는 '우리'와의 차이들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을 때는 줄거리에 해당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것이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자폐를 가진 사람들이 비자폐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많은 장면을 할애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럼으로써 자폐라는 정신적 장애에 대한 시청자들의 아직 부족한 인식을 증진시킬 뿐 아니라, 자폐와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을 시청자들이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결론적으로, 좀 더 의도적으로라도 미디어를 통해 소수 집단과의 간접 접촉을 증진시키는 것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들이 지니는 '차이'를 얼마나 비중 있게 묘사할지는 그 차이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따라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 줄 요약: 아직 확실하지 않고 의혹만이 있는 일에 대해 기사를 쓸 때는 그 내용에 특별한 표시를 하면 어떨까?
요즘은 범죄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 기사들에서 어떤 수사 결과나 법률적인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진실은 뭐다라고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용의자'나 '피의자' 대신 '가해자'와 같은 표현을 쓰거나, 피의자가 했다고 짐작되는 행동을 마치 실체적 진실인 것처럼 묘사하곤 한다. 특히 성범죄에 관해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건 이미 갖다 버린 것 같다. 독자가 도덕적인 분노를 느끼는 만큼 재판이 끝나기 전이라도 빨리빨리 범인을 잡아 대령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그나마 기사 본문에는 자세한 사정을 쓸 수 있겠지만 제목은 내용은 짧게 해야 하고 클릭수는 최대한 늘려야 하므로 이런 경향이 훨씬 심하다. 의혹 수준인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표기를 하면 어떨까? 작은따옴표를 쓸 수도 있겠지만 작은따옴표는 여러 가지 다른 기능으로도 사용되므로, 잘 안 쓰는 기호를 사용하여 뭔가 새로운 표기법을 쓰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연구비 횡령} 충북대 박모 교수 검찰에 송치 이와 같이 표기하면 { } 안의 내용은 아직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의혹 수준이라는 뜻이므로 독자는 '아직 박모 교수를 욕할 단계는 아니구나, 좀 더 기다렸다가 욕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정말 '유죄 추정'을 하는 일이 줄어들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표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기사가 실질적으로 피의자의 죄를 전제하고 쓴 것이 아니어야 이런 표기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기자가 이미 범인을 마음 속으로 다 잡아 놓고 기사를 쓴다면 어떤 표기법을 쓰더라도 그 대상인 사람에게 굴레를 씌우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한 줄 요약: 게임을 통해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한다.
얼마 전에 예전에 생각했던 아이디어에 대해 쓴 적이 있었는데 한 가지 더 소개를 해 보려고 한다. 이 아이디어는 더 옛날부터 생각을 해 왔던 것으로, 탈북민들의 금융 이해력(financial literacy)을 높여주는 게임을 만들자는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해야지 생각했던 것이지만 언제 할지 기약도 없고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서 여기에라도 공개를 한다. 너무 오래된 생각이라 어쩌면 누군가가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별로 말이 되지 않는 아이디어일지도 모르겠다.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도록 하려면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재정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일 것이다. 그러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어떻게 벌고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과 능력, 즉 금융 이해력(financial literacy)을 갖추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교육과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런 교육이나 훈련은 재미도 없고, 바쁘고 여유가 없는 탈북민들에게 쓸데없고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게임으로 만들어서 탈북민들이 잠시 TV를 볼 시간이나 출퇴근 시간에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즐겁게 교육과 훈련을 받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본 아이디어의 요지이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gamification이나 serious game에 해당하는 것이 되겠다. 삶의 경제적 측면을 모사한 게임에는 모노폴리나 인생게임 류의 보드게임이 있지만 이런 게임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단순하다. 또 경쟁 일변도의 게임이라 게임을 하면서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플레이어의 기술이나 노력보다는 우연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 전문가와 게임 개발 전문가, 탈북민 정착 전문가, 탈북민들이 함께 참여해서 게임을 개발한다면, 탈북민들이 서로 도우며 게임을 즐기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능력, 생활 습관을 습득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을 통해 습득하게 하는 지식, 기술의 예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기타
한 줄 요약: 시위의 소구력을 높이기 위해 시위를 접하는 시민 개개인의 가치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문제의 해결됨 없이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는 시위를 보면서 그분들이 호소하는 것들이 그분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일인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되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메시지 자체는 날이 갈수록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끼쳐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나 공감을 유도하는 데 실패하고 무관심만 증가시키게 되는 것 모두 그분들이 원하는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므로 '전략'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게 부적절하게 들릴 수 있지만, 중요한 문제이기에 더더욱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모두가 귀를 기울여줄 것으로 기대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지 않은가? 전장연의 지도부에 '어떻게 하면 우리의 메시지가 시민들에 더 잘 수용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심리학자는 시위를 하는 분들께 무슨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관찰자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같은 행동을 보는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이 달라지면 그 행동에 대한 태도도, 행위자에 대한 반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Schwartz에 따르면 개인들은 다양한 가치들 중 각자 서로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마치 성실성이나 경험에 대한 개방성 등 여러 성격 차원들에 있어서 높고 낮은 정도가 다르듯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차원들에 있어서도 개인마다 독특한 패턴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패턴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성향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편주의(universalism), 박애(benevolence) 등의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안전(security), 성취(achievement), 동조(conformity) 등의 가치관을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행동이나 사건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도우려고 할 것이고, 자기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행동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덜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에 정서적인 공감을 더 쉽게 하고 그들과 기꺼이 연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인 정체성을 재확인하려고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최근 한겨레 신문사에서 이른바 '지각 연대', 즉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인한 지각은 양해해 주는 방법으로 시위 집단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례를 보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취약 계층의 호소가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시위자들로 인해 불편이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며, 오히려 불편을 느낀다는 것이 그들의 연대 의식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립을 중요시하여 누구든 자신의 문제를 알아서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의지하거나 피해를 끼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각에서는 현재의 전장연의 시위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문명적이다'와 같은 냉정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보수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그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날 요소들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취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부당하게 장벽에 부딪히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장애가 있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자신의 장애와 관련하여 겪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정계에 진출하려고 하는 등의 사례를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시위의 내용과 무관하게 시위자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행동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위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여러 정치적 성향에 맞추어 시위의 방법과 내용을 고려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다 높은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시민들에게까지 호소하느니 그냥 더 친숙하고 확실한 계층에만 선택과 집중을 하는 더 쉬운 길을 택해도 되지 않겠냐만, 절박한 문제인 만큼 더 폭넓은 지지를 얻으려 시도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시위가 더 길어지고 시민들의 피로감과 무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1) 가장 중요한 한 가지씩만의 목표를 잡는 시민 활동
옛날의 한 영화의 대사에 "난 한 놈만 팬다!"라는 게 있었는데,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 사회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이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충분한 동력을 얻을 수 없다. 시민 사회가 그때그때 가장 중요한 현안 딱 한 가지를 정해서 모두가 그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참여자를 최대한 많이 모을 수 있고 해결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의 수당을 일한 만큼만 받게 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한다든지, 정치인들과 각 정부 기관의 장의 자녀의 입시 부정 여부를 전수 조사하도록 한다든지 하는 요구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급되지만,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면 금방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만다. 이런 일을 하나씩 정해서 시민 사회가 해결이 될 때까지 그것에 매달린다면 시민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속 기간은 문제가 해결이 될 때까지 하거나,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참여자들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일정한 기한(석 달 내로 해결을 해야 한다든지?)을 정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기한을 정해 놓는 것은 참가자들에게 긴박감을 주어서 더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의 선정은 게시판에서의 토의와 투표를 통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안을 정하는 식으로 한다. 찬반이 심하게 갈리는 사안은 선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마치 줄다리기에서 힘을 집중하면 더 큰 힘을 모을 수 있는 것처럼 비교적 단순하고 줄기찬 요구가 필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이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2) 시민들의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활동 위의 1)에서의 활동은 정부 등에 요구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겠다 또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 기업과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거나 내부고발자를 따돌리지 않고 보호하겠다고 맹세를 하는 것, 과거에 어떤 잘못을 한 정치인들에게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맹세 등이 있을 수 있다. 이것 역시 1)의 활동에서처럼 하나씩 사안을 정해서 그에 대해 시민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정하고 그 실천을 다짐하는 식으로 진행할 수 있다. 다짐은 기명 또는 무기명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보가 제시되면 그 정보는 규범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고, 기명으로 할 경우에 특히 이 효과가 클 것이다. 참가자들의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각각의 다짐에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책임을 지지 않는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이용하지 않겠다."라는 다짐이 있다면 그러한 경우들, 이를테면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팔아넘긴 회사나 가습기 살균제로 많은 소비자들을 죽여 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회사의 사례에 대한 뉴스가 쉽게 검색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웹사이트에서 직접적으로 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뉴스를 검색할 수 있게 한다면 복잡한 법적 문제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활동은 시민들 자신의 행동을 변화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지만, 결국 기업이나 지배층 인사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기업들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책임을 더 지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다. |